택견의 역사

고구려 택견

> 택견의 역사 <

택견은 지금부터 2천년전 고구려를 지켜온 민족무예로서 1987년 7월 작고한 인간문화재 故 신한승선생에 의하여 체계화되고 정립되어 1983년 6월 1일 무술로서는 처음으로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제 제76호로 지정된 조상의 얼이 담겨 있는 우리 민족의 유일한 전통 무술이다. 광활한 대륙을 지배하던 고구려인들의 활기찬 기상의 원천이 된 것은 바로 택견과 같은 온후하고 낭만적인 민족무예가 있었기 때문이다.
택견에 대한 기록이 미흡하기는 하나 <고려사>라든가, <세종실록지리지>, <재물보>, 안곽의 <조선무사영웅전>, <조선상고사>, <동국여지승람>, <해동죽지> 등에 택견에 대한 기록이 그나마 있어 택견이 우리 민족을 지켜온 호국무예로서 장려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상고사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기록을 보면 고구려 당시 매년 3월이 되면 신수두라는 제전행사가 열리는데 성대한 각종 무예시하이 벌어졌다 한다. 왕이 지켜보는 가운데 용맹한 무사들이 나와 <덕건이(택견).도 하며, 그 밖에 격검, 사예, 기마 등 각종 무예를 겨루어 그 중 승리하는 자를 선배라 칭하여 무예를 장려했던 것이다. <조선상고사>의 기록에도 있듯이 송도의 택견(수박)이 지나에 들어가 권법이 됐고, 일본에 건너가 유술이 되었다는 기록을 보아 우리 민족무술인 택견은 각종 무술의 기본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원동력이 되었던 택견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숭문천무사상으로 인해 점차적으로 쇠퇴하게 되었으며 더구나 1910년 한일합방과 더불어 일제의 한국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못 이겨 택견꾼들은 일경의 눈을 피해 산에서 혹은 들로 들어가게 됨으로써 택견의 맥은 자칫 끊어질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후 작고한 인간문화재 신한승선생의 피나는 노력으로 인해 사장되었던 택견은 다시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어느 무술에서도 느낄 수 없는 택견의 독특한 몸놀림은 능청거리기도 하고 때로는 우쭐거리기도 하며, 혹은 발로 차기도 하고, 혹은 상대의 다리를 걸어서 넘어뜨리기도 하는… 서두르지 않고 여유있는 자연적인 무예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우리 조상들의 혼이 깃들어 있는 민속무예 택견이 원형을 보존하고 전승 보급키 위해 국가에서는 택견의 전승지인 충주에 21억 8천만원의 건립비를 들여 부지 2,069평, 연건평 291평의 택견 전수관이 1997년 5월 31일 건립되어 국민들의 무예 수련장으로 활용되고 있다.